의료민영화 영화, 존큐(John Q), 2002

2014. 6. 17. 02:59Shared Fantasy/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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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

 

영화를 마치고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은 감상문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검색해보거나 워드 빈 페이지를 여는 일이 아니었다. 영화 엔딩에 검정화면으로 바뀌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마자 검색 창에 ‘의료민영화’를 검색했다. 어쩌면 교수님이 이 영화를 과제로 선정하신 이유가 이런 걸까. 나와 같이 별 생각 없는 학생들이 관심 갖게 하는 것 그리고 검색까지 유도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뉴스에서 봐왔던 단어, 익숙하지만 친근하지 않은 단어 바로 ‘의료민영화’ 였다. 그토록 자주 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관심 가져본 적도 없으며, 그게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백날 의료민영화에 대해 떠든다고 하더라도 글쎄… 존큐 만큼 강한 한방이 있을까.

 

'의료민영화'에 관한 것이면 늘 미국이 함께 언급된다. 전 세계에서 전국민 건강보험을 의무화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 넘어져 무릎이 찢어져도 집에서 스스로 바늘을 소독해 꿰매는 미국인들. 영화는 미국의 영세시민, 어쩌면 가장 흔한 소시민일 흑인 가정에 들이닥친 아들의 병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돈이 없어 보험을 들지 못한 것도 아니고, 꼬박꼬박 보험 비를 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혜택을 받지 못하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금 차가운 이성에 근거해 존큐를 요약하자면, 미국 의료민영화에 대한 폐해를 부성애의 드라마로 그려낸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마냥 이성적일 수는 없을 터, 사전에 어떠한 정보도 없이 보게 된 영화라 특히 부성애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했으며 영화 절정에서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는 가슴이 미어져 오열하기도 했다.

 

감정적으로 한참을 휩쓸리고 나면 곧이어 분노까지 치민다. 대체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이게 혹시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건지. 곧바로 의료민영화에 대해 검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금은 이기적이지만, 나도 그동안 내 일이 아니라 여겨 관심 없었다. 내 스스로 참 단순하고 또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차원적이고 단순한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면서 말이다. 아들을 향한 아빠의 사랑, 그 흔한 사랑이란 감정에까지 관여 또는 치명적으로 작용한 미국의 의료민영화. 그 애틋한 부성애와 그것을 ‘유죄’라 판결하게까지 만드는 사회에 대해 내 멋대로 떠들어보고자 한다.

 

- 불행=흑인?

 

먼저, 영화 주인공이 흑인인 것에 대해 떠들어보고 싶다. 시작부터 긴장되게 주인공은 하필 흑인이었다. 여기서 ‘하필’이라는 것은 ‘영화’의 주인공이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불행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아온 내가 아니기에 어려서부터 흑인이든 백인이든 누가 잘났고 못났음 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흑인이 더 섹시한 거 같다고 생각해왔던 나다. 하지만, 흑인 불평등에 대한 문화 컨텐츠를 하도 봐서인지 그들이 주인공이라는 데에 내 마음은 긴장에 더 익숙해진 것 같다. 유색인종에 관한 서양 드라마, 문화 컨텐츠는 항상 흑인을 불리한 설정으로 몰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희생과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 어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게 흑인들을 위한,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처우가 맞는 걸까 생각해본다.

 

진정 그들을 위하는 이야기라면, 불행했던 옛날이나 지금의 불평등 이야기 대신 흑인 영웅물이나 행복한 흑인을 보여주는 상황 설정이 더 멋지고 나은 처우 아닐까. 버젓이 흑인이 대통령을 하고 있고 흑인 처우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자체가 민망스러운 현시대에 이런 우울한 이야기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것에 답답하고 화가 났다. 오히려 백인이 희생되고 처절하게 영세시민 취급 당했다면 그거야말로 미국인들에게 더 자극적으로 호소하지 않았을까. 2002년 영화이기에 그러려니 하는 부분이지만, 더 이상은 불행한 이야기에 흑인들이 주인공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매 영화마다 우울한 이야기에 흑인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관람객들의 머릿속에 불행은 흑인이라는 연상관계를 주입시키고 있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공부된 불안감이라고 생각한다.

 

- 7500만원 당장 못 내면 가난한 시민?

 

영세시민 설정의 가정, 여기서 이들이 보험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할 가난한 부류의 가정으로 비춰지는 것도 불편했다. 어쩌면 전 세계 설사 미국에서라도 이들은 가난한 가정이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가장 흔하고 두터운 층인 소시민 계층이다. 얼마 전,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뱉은 “절대 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처럼 영화 속 존의 가정은 우리 주변의 흔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당장 7500만원을 떡 하니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돈으로 수술이나 되면 몰라, 30%의 계약금이라니.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도움 받지 못하는 시민으로 그려져 마음이 불편했다. 세상은 영화 속에서처럼 그렇게 차갑고 무서운 곳만은 아닌데 감정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극적으로 설정된 것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사지 멀쩡하고 정상적인 직업 가졌으며 행복한 가정이 입이 떡하고 벌어질만한 액수의 돈을 바로 내놓지 못한다고 이야기 속 불행의 끝으로 내몰다니.

 

- 사람들

 

영화 리뷰를 보니 주인공만이 살고 주변 캐릭터들은 묻혔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와 반대되는 생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연 존큐 뿐만 아니라 조연 심지어 대사 몇 마디의 방송국 스텝마저 시사적인 캐릭터를 지녔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지극정성인 부성애 존큐를 더욱 빛나게 한다.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특성, 망가진 사회를 대변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을 아무렇지 않고 조용히 흘러가는 듯한 조연들의 연기로 표현했다. 비평적인 시각이 아니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캐릭터에 특히 집중해 볼만 하다.

 

경찰국장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뒤에서 연신 보여지는 이미지에 근거한 말들만 뱉어대고 병원 이사장 여자는 존큐에게 마음이 동하기까지 소름 돋을 정도로 웃음과 정색 사이 표정만 지어댄다. 방송국 앵커는 존큐에게 데스크에 번호 남기고 가라며 쓸 데 없이 가식적인 희망고문을 하며 뒤에서는 이슈가 될만한 방영 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극히 사회 퇴폐적인 인물이다. 인질 중에서 여자친구 팔이 부러졌어도 자신 팔 긁힌 게 대수인 것마냥 떠들어대는 이기적인 멍청이, 흡사 힙합퍼처럼 건들대며 존큐를 응원하고 엔딩 씬에서는 존큐에게 ‘You are my hero’라고까지 외치는 동질감 느끼는 흑인, 영화 초반부터 내내 돈만 밝히며 의사로써의 책임은 회피하려는 가진 자 심장외과 의사 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인들 캐릭터를 한 명 한 명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성격을 통해 이기적이거나 정 넘치는 현실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굳이 의식하거나 일일이 분석하지 않으면 물 흘러가듯 자연스레 넘어갈만한 조연들의 연기는 또 다른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미지 챙기며 진심의 동요나 소재의 진정성 따위는 잊어버린 채 카메라 앞에서 이슈거리만 만들기에 급급한 앵커의 모습을 보면 비현실적으로 책임감 결여된 공인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냥 저럴 수도 있겠지 하며 크게 와 닿지 않던 그의 성격. 언제부터 극 악인의 모습을 이해하고 수긍해 온 것인지. 영화 곳곳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퇴폐적 사회인의 모습에 언제부터 우유부단해졌는지. 자극적인 소재가 넘치는 사회에서 내가 이미 퇴폐에 무뎌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카메라는 존큐 만을 조명하지만, 그 이면에 등장하는 조연들을 통해 감독은 사회적 폐단과 찌든 사회인들을 지적하고자 했을 것이다.

 

- 과연 나는?

 

단순히 영화 한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같이 사회 문제에 무감각하던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갖게 하는 마법과 같은 2시간짜리 영상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인 자극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미국 의료민영화의 폐해, 그 폐단이 우리나라에 얼마만큼 진행됐고 앞으로 얼마만큼 물들게 할지 영화 분석에 대한 조사보다 더 많이 찾아본 것 같다. 내가 비록 아직 자식은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돈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수술비를 지불하지 못해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일으키는 감정 동요도 없을 거라 생각된다.

 

단연 앉아서 이렇게 “자극이 되었다, 생각해본다” 뱉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25년 살아오면서 내가 속한 사회에 적응할 줄만 알았지, 자의적으로 무언가의 변화를 꽤 하거나 열정적으로 앞장서 움직여 본적이 있나 싶다. 어느 시대의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는 신분을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기도 했으며 또 어느 시대의 청춘은 피를 뿜으며 민주의식을 쟁취해오기도 했다. 과연 내가 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의료민영화 뭐 같다 라며 마냥 비난만 하는 게 사회에 얼마만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여느 시대의 청춘들처럼 열정적으로 우리 사회의 주권을 쟁취하려 노력할 수는 없는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글 : 임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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